(환영이 형이 용산 골목 벽에 써놓은 동시, 달팽이 집)
달팽이는 날 때부터
집 한 채씩 지고 왔으니,
월세 살 일 없어 좋겠습니다!
전세 살 일 없어 좋겠습니다!
몸집이 커지면
집 평수도 절로 커지니,
이사 갈 일 없어 좋겠습니다!
사고팔 일 없어 좋겠습니다!
뼛속까지 얼어드는
엄동설한에,
쫓겨날 일 없어 좋겠습니다!
불 지를 놈 없어 좋겠습니다!
(환영이 형이 용산 골목 벽에 써놓은 동시, 달팽이 집)
달팽이는 날 때부터
집 한 채씩 지고 왔으니,
월세 살 일 없어 좋겠습니다!
전세 살 일 없어 좋겠습니다!
몸집이 커지면
집 평수도 절로 커지니,
이사 갈 일 없어 좋겠습니다!
사고팔 일 없어 좋겠습니다!
뼛속까지 얼어드는
엄동설한에,
쫓겨날 일 없어 좋겠습니다!
불 지를 놈 없어 좋겠습니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스물 여덟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 하지 않겠냐고 찾아 왔다
얘기 말엽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 동지는 어느 대 출신이요?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처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
십 수 년이 지나 요 근래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내게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에 기대 있고
걷어 채인 좌판,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광화문을 지나던 길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교보문고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심리학 코너에서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라는 책을 발견했다.
앞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다만, 편안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닻을 올리고, 지금 막 돛이 바람을 타기 시작했으니까, 당분간은 그저 아름다운 파도와 하늘을 바라보며 행복에 젖자. 그 정도는 허용된 일이다.
...
모든 것이 원래 상태대로 돌아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난 이 변화는 세월을 따라 늘어가는 나이에 흡수될 것이다. 아아. 정말, 모르는 채로 있는다고 좋은 일은 하나도 없다.
봄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버스 한 켠에 앉아
흔들리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야요이가 언니를 찾아 오소레 산으로 가는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바닐라 유니티가 리메이크 한 'Nuno'의 'Crave'가 흘러나오고
오소레 산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야요이는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
기억을 되찾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또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찾아낸' 인생,
새롭게 만들어 갈, 불안하고 두렵지만 설레는 미래이다.
한 동안, 마음을 침잠시키는 바나나나 하루키 류의 글을 경계했었다.
하지만 역시, 바나나의 글을 읽으면 그녀가 묘사하는
매 장면과 구절 하나하나 마다에 모든 경계를 놓치고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해야겠다.
바나나의 글을 읽다보면
불안하게 흔들리면서도 용기 있게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 순간의 불안과 기대, 설레임까지
모두 내 것이 되어버린다.
그녀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죽음'이라는 모티브는
언제나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기회를 만들어주며
새로운 관계를 맺어준다.
자칫 그저 진부할 수도 있는 소재를
색다른 각도로 보여주며
또 다시 이렇게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녀의 재주가 부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