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오래된 나무 책상 위에 흐트러져 있는 편지지들과 적막한 방 안을 울리는 작은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 참 오랜만이야. 이런 설레는 기분. 역시, 톡.톡.톡 하는 컴퓨터 자판의 느낌보다 내 손을 타고 종이 위를 흐르듯 춤추는 연필의 느낌이 훨씬 좋구나.
어제, 서울에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어. 어젯밤 통화에서 엄마는 차 막힐 걱정에 한숨부터 내쉬었지만, 난 알아. 엄마도, 너도 그리고 아마 모두, 오늘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창가로 달려갔으리라는 걸. 눈부시게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하얀 눈들이 온 세상을 뒤덮은 풍경을 보며 남몰래 미소 지었을 테지. 출근길에는 혼자서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찾아 걸었을 테고, 차 위에 쌓인 눈들을 모아 조그만 눈덩이도 만들어 보았겠지. 행복은 참 소소한 거야.
멜번은 한여름이야. 한국의 여름 날씨와는 차원이 다른, 고온건조한 공기에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지경이지. 지금은 밤이라 조금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지만 낮에는 정말이지 비 오듯 땀이 쏟아지는 한국의 여름이 그리웠어.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왔는데 불과 3개월 만에 이렇게 모든 것이 그리워지는구나. 그때는 그저,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와 상황들로부터 철저히 분리될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랬었는데.
여기 멜번은,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한 하늘과 지붕이 보이는 낮은 집들, 집집마다 주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조그만 정원들이 참 좋아. 시내 곳곳의 보도블록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자신을 보여주고자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 튼튼한 두 다리만으로도 시내의 구석구석을 모두 누빌 수 있지. 시내를 벗어날 때면, 나는 늘 천천히 움직이는 트램을 타. 트램으로는 시내에서 집까지 45분이나 걸리지만 두 칸짜리 트램 안에서는 사람들이 왠지 더 친밀하게 느껴지거든. 자기들끼리 화음까지 넣어가며 팝송을 부르는 십대 여자애들이나 처음보는 나에게 대뜸 자식 자랑부터 늘어놓는 할머니, 출근 길 트램 의자 위에 화장품을 잔뜩 꺼내놓고 화장을 하다가 인스펙터에게 걸려 후다닥 내리던 여자와 비닐봉투에 싸온 콩을 쉴새없이 먹어대던 샐러리맨까지. 그렇게 트램 안에서 그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왠지 그들 사회의 일원이 된 것만 같았어. 트램에서 내리고 나면, 나는 결국 이방인일 뿐이었지만.
지난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일까. 나의 불안과, 나의 외로움과, 그 공허함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한국을 떠나올 때, 나는 답을 찾고 있었어. 그런데 그렇게 트램 안에서, 관계로부터 도망쳐 온 내가 다시 관계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거야.
응. 한국의 하얀 눈이 그리워. 그리고 그 눈을 함께 맞을 사람들이 애타게 그리워. 꽉 막힌 도로 위에서 간신히 정류장을 비집고 들어오는 버스에 오르며 함께 눈을 털 사람들이. 싸우고, 화나고, 울고, 욕하는 그 모든 일상과 감정들이.
눈송이마다 숨겨진 아름다운 결정들을 발견했을 때처럼, 이제 나는 답을 찾은 것 같아.
곧 돌아갈거야. 공항에 마중나와 줄래? 너의 눈빛을 마주보며 활짝 웃을 수 있도록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