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사각'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07/12/16 1월의 이야기
  2. 2007/12/16 축제의 마지막 밤
  3. 2007/12/16 선택
  4. 2007/05/28 나는 이미 그 때 죽었어요.
  5. 2007/02/27 자신감에 찬 어느 하루 (1)
2007/12/1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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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에게.
 
  오래된 나무 책상 위에 흐트러져 있는 편지지들과 적막한 방 안을 울리는 작은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 참 오랜만이야. 이런 설레는 기분. 역시, 톡.톡.톡 하는 컴퓨터 자판의 느낌보다 내 손을 타고 종이 위를 흐르듯 춤추는 연필의 느낌이 훨씬 좋구나.
 
  어제, 서울에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어. 어젯밤 통화에서 엄마는 차 막힐 걱정에 한숨부터 내쉬었지만, 난 알아. 엄마도, 너도 그리고 아마 모두, 오늘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창가로 달려갔으리라는 걸. 눈부시게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하얀 눈들이 온 세상을 뒤덮은 풍경을 보며 남몰래 미소 지었을 테지. 출근길에는 혼자서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찾아 걸었을 테고, 차 위에 쌓인 눈들을 모아 조그만 눈덩이도 만들어 보았겠지. 행복은 참 소소한 거야.  
 
  멜번은 한여름이야. 한국의 여름 날씨와는 차원이 다른, 고온건조한 공기에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지경이지. 지금은 밤이라 조금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지만 낮에는 정말이지 비 오듯 땀이 쏟아지는 한국의 여름이 그리웠어.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왔는데 불과 3개월 만에 이렇게 모든 것이 그리워지는구나. 그때는 그저,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와 상황들로부터 철저히 분리될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랬었는데.
 
  여기 멜번은,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한 하늘과 지붕이 보이는 낮은 집들, 집집마다 주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조그만 정원들이 참 좋아. 시내 곳곳의 보도블록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자신을 보여주고자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 튼튼한 두 다리만으로도 시내의 구석구석을 모두 누빌 수 있지. 시내를 벗어날 때면, 나는 늘 천천히 움직이는 트램을 타. 트램으로는 시내에서 집까지 45분이나 걸리지만 두 칸짜리 트램 안에서는 사람들이 왠지 더 친밀하게 느껴지거든.  자기들끼리 화음까지 넣어가며 팝송을 부르는 십대 여자애들이나 처음보는 나에게 대뜸 자식 자랑부터 늘어놓는 할머니, 출근 길 트램 의자 위에 화장품을 잔뜩 꺼내놓고 화장을 하다가 인스펙터에게 걸려 후다닥 내리던 여자와 비닐봉투에 싸온 콩을 쉴새없이 먹어대던 샐러리맨까지. 그렇게 트램 안에서 그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왠지 그들 사회의 일원이 된 것만 같았어. 트램에서 내리고 나면, 나는 결국 이방인일 뿐이었지만.
 
  지난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일까. 나의 불안과, 나의 외로움과, 그 공허함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한국을 떠나올 때, 나는 답을 찾고 있었어. 그런데 그렇게 트램 안에서, 관계로부터 도망쳐 온 내가 다시 관계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거야.
 
  응. 한국의 하얀 눈이 그리워. 그리고 그 눈을 함께 맞을 사람들이 애타게 그리워. 꽉 막힌 도로 위에서 간신히 정류장을 비집고 들어오는 버스에 오르며 함께 눈을 털 사람들이. 싸우고, 화나고, 울고, 욕하는 그 모든 일상과 감정들이.
  눈송이마다 숨겨진 아름다운 결정들을 발견했을 때처럼, 이제 나는 답을 찾은 것 같아.
  곧 돌아갈거야. 공항에 마중나와 줄래? 너의 눈빛을 마주보며 활짝 웃을 수 있도록 말이야.



- 2007.12.7 한 페이지 단편소설에 업데이트.
Posted by 틈새
복잡했던 학내 사정으로 인해 너무 늦게 시작해버린 축제의 마지막 행사의 테마는 날짜 그대로, '시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마자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렇지 않아도 썰렁한 축제의 분위기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고 있었다.
  저녁 8시.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 않고 저편 잔디밭에서는 가수 김장훈이 그만의 꺾어지는 목소리로 마지막 축제의 아쉬움을 달래주고 있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다 쓰러져가는 학회 주점의 천막 아래 앉아 대통령이니 자본가들이니 하는 것들을 오징어보다 질기게 씹으며 조잡한 두부김치에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씨발. 이 판국에 김장훈이 다 뭐야아~!!"
 
  빗줄기가 잔디밭 위에 어설프게 펼쳐놓은 은박 돗자리 위로 스멀스멀 파고들 무렵, 취기가 오른 한 녀석이 고래고래 욕을 섞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우리는 기다리기라도 했던 듯 술병을 하나씩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 고함을 내지르다 이내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슬프고 심각하고 또 우스웠는지 우리는 노래를 부르다 부둥켜 안고 울다가 이내 미친 듯이 웃기도 하며 그렇게 뒤엉키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 지쳐 결국 다 젖은 잔디밭 위에 누워서 뒹굴고 있을 때였다.
 
  "주연아, 엄마야."
  "어어어어? 응? 누구? 엄마? 아~엄마! 우리 엄마! 아하하하~"
  "주연아, 그 여자 죽었대."
  "아하하~뭐라구? 누가 죽어?"
  "그 여자 말이야. 문주혜."
  "......"
  "오늘 뭣 좀 물어보려고 거기 주인집에 전화했다가 들었어. 암이었댄다. 참...세상 일이 어떻게 이러니."
 
  문주혜. 문주혜가 죽었다고,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애인이었던 그녀의 사망 소식을 비에 젖은 핸드폰 저편에서 엄마가 전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 가족을 다 파탄내고 엄마를 떠나게 했었던 그 여자.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우리에게 반찬을 만들어주며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하려 했던, 그 여자가 문주혜였다. 그러나 급작스레 전개된 그 모든 상황 앞에서 그저 동생들과 함께 살아날 궁리에 바빴던 열 세 살의 나는 결국 그 뻔뻔한 여자가 만들어주는 반찬을 받아 먹기로 했고, 엄마가 돌아오기 전까지 일 년 동안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 여자의 지하 월세방을 찾아가게 되었더랬다. 추석을 앞둔 어느 가을 밤, 유난히 밝은 달빛에 엄마 생각이 나서 혼자 놀이터에서 울고 있던 나에게, 들고 나온 얇은 점퍼 하나를 덮어주며 그녀는 말했다.
 
  "주연아. 11월은 십일월이고 12월은 십이월인데 10월은 왜 십월이 아니라 시월일까? 나는 시월이 좋아. 뭔가 아쉽고 애틋하고 완성되지 않은 그런 느낌. 인생이란 게, 꼭 시월 같아."
 
  '헛소리하고 있네' 속으로 비웃으며 아무 말 없이 혼자 집으로 먼저 들어와 버렸던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그녀 역시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씨발. 이 판국에 시월이 다 뭐야아~!!"
 
  들고 있던 전화기를 내던지며 교문을 향해 달려가는 나의 등 뒤로 '갑자기 어디 가는거냐'는 친구들의 고함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지만 시월이 싫고 축제가 싫고 마지막이 싫어서 나는 그저 무턱대고 달렸다. 굵어지는 빗줄기 속에서 '시월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2007.9.20 한 페이지 단편소설에 업데이트
1pagestory vol.2 <시월의 마지막 밤> 당선작

Posted by 틈새
2007/12/16 14:34
새벽 세 시. 늘 이 시간이다.
  적막한 세상 속에서 지치도록 울어대는 개구리들과 짙은 어둠속의 빨간 담뱃불 하나만이 이 새벽, 유일한 나의 친구다. 시유지의 단층짜리 조그만 집들이 오밀조밀 지붕을 내밀고 있는 풍경을 계단 난간에 앉아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이렇게 앉아 있다가, 균형을 잃은 내 몸이 뒷쪽으로 살짝만 기울어져도 나는 순식간에
         저 아래로 떨어지게 되겠지.
 
 
  순간, 난간을 잡고 살짝 아래쪽을 내려다본다. 가운데로는 이 집과 시유지의 저쪽 단층 집들 사이를 가르는 낮은 담벼락이 지나고 있고 건너편에는 푸른 지붕의 집들이 대여섯 채 붙어 있다. 문득, 떨어지다가 저 푸른 지붕 위에 머리를 부딪히게 된다면 나의 붉은 피와 저 푸른 지붕이 멋지게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 위를 고양이들이 귀여운 발자국을 남기며 지나가고.
 
 
        아픔은 잠시일거야. 아니, 어쩌면 떨어지는 순간 머리가 산산조각 나버려 아픔조차
        느끼지 못할 지도 모르지. 나의 장례식장엔 누가 올까? 누군가가 나의 핸드폰과 수첩을
        샅샅이 뒤져 생전에 내가 알던 모든 사람들을 불러주어야 할텐데...
        연락망이 곧 돌 것이다. 고등학교 동창들, 대학 동기들과 선후배들, 나의 동료들과
        선생님들이 오겠지? 오래 전 교회 친구들과 초등학교 동창들도 와줄까?
        아,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도!
 
 
  몇 명이나 올 것인지 세어본다. 200명? 300명? 더 많을까? 엄마 친구들이나 동생 친구들도 있으니까... 그럼 한 500명? 조의금 걷어서 울 엄마 부자되면 나, 마지막으로 효도하는 거다.
 
 
        아마도 S가 가장 슬퍼하겠지. 그녀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를 아껴주던
        사람이니까... 나 역시 S에게 가장 미안할거야.
        내가 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후배 T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며 울겠지?
        그 아이는 나를 많이 의지했었으니까...
        언제나 나를 믿어주던 선배들은 나를 강한 아이로만 생각하고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될거야.
        엄마는, 나약하고 어린아이 같은 우리 엄마는...아마도  나에게 제대로 주지 못한
        사랑을 되새기며 후회하겠지. 나에게 주었어야 마땅한 그 사랑을 그녀의 남자에게
        쏟아부은 것을, 평생을 두고 미안해하게 될 테니까.
        동생도 나에게 못되게 굴었던 날들을 미안해 할거야. 필요할 땐 내가 언니 역할을
        해 주길 바랬다가도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지면 나를 욕하고 밀쳐내고 고자질했던
        너의 지난 날들이 못 견디게 괴로워질 거다.
        아마도 모두가, 그제서야 내가 그들에게 해주었던 많은 것들을 깨닫고 내가 얼마나
        그들에게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되겠지. 나의 영정 사진 앞에서 미안하다고,
        고마웠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며 통곡하겠지.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어. 이미 나는
        당신들 곁에 없을테니까. 당신들은 내게 미처 해주지 못한 일들과 내게 했던 잘못들을
        되씹으며 그것들을 평생 짐으로 안고 살아가게 될거야.
        내 존재의 소중함과 당신들의 죄책감.
        그것들이 언제나 당신들의 뒤를 따라다니게 될거야....
 
 
  ......쿵.
 
 
 
  암흑. 어둠 속에서 산산이 부숴진 머리통. 터져나온 뇌수.
  나의 죽음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눈물이 흐른다. 그래. 나는 죽음으로써 내 존재를 확인받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그들에게 소중한 존재인지, 그들이 정녕 나를 그렇게 여기고 있는지 간절히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죽어버린 육체와 결코 죽지 못할 불쌍한 나의 영혼은 이렇게 매일 같이 다시 그 날로 돌아와 감정을 게워내는 좀비가 되어버렸다.  
  많은 이들이 나의 죽음을 슬퍼해 주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곧 다시 그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던 것이다.  


-2007.7.8 한 페이지 단편소설에 업데이트
 1pagestory vol.1 <좀비> 당선작

Posted by 틈새

나는 이미 그 때 죽었어요.
 
  당연히 모르시겠지만요. 나는 이미 그 때 죽었어요.
  할아버지가요. 나를 부르셨거든요. 그런데 나는 귀찮아했어요. 아빠가 오시기까지, 새벽이 되도록 할아버지 곁에 앉아있어야 했거든요. 그런데 또 이른 아침부터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니 눈도 안 떠지고, 솔직히 정말 귀찮아하면서 일어난 거예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는데 할아버지가 계속 내 이름을 부르면서 나를 향해 손을 내밀잖아요. 어쩔 수 없이 나갔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그 때부터 혀가 꼬여요.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데 자꾸 손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켜요. 나는 그게 요강인 것 같기도 하고 이불인 것 같기도 하고 나보고 할아버지를 방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해서 자꾸 물어보는데 할아버지가 말을 못하잖아요. 그 때부터 나는 두려워졌어요. 할아버지에게 다가 앉아서 입을 벌려 보았는데 할아버지 혀가 안으로 말려 있잖아요. 밖으로 잘 꺼내지지도 않구요. 그래서 병원에 전화를 했어요. 간호사가 졸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더니 당직 의사 바꿔주겠다고 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는 거예요. 아. 나는 왜 그 때 119에 전화하지 않은 걸까요? 왜 119가 아닌 그 후진 병원에 전화를 한 것일까요? 사람이 죽어가는데 잠이나 쳐 자다가 아침 일찍 걸려온 전화에 귀찮아하고나 있을 그 빌어먹을 의사 목소리를 내가 기다리는 동안, 할아버지의 손짓은 멈추고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사라지더니 쪼그리고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그만 털썩 주저앉아 버렸잖아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정말요. 전화를 끊어버리고 할아버지에게 갔는데 할아버지가 눈을 뜬 채로 허공을 바라보며 가만히 주저앉아 있어요. 어느 새 동생들도 일어나고 나는 눈물을 흘렸던가. 흐느끼기 시작했던가. 아. 기억나지 않아요. 옆집 아주머니가 오셨고. -아이고 이게 웬일이야. 돌아가셨네. 돌아가셨어. 하고 호들갑을 떨면서 할아버지를 방으로 옮겨주었죠. 이제 할아버지는 방에 누워있어요. 동생들은 영문을 모르고 멀뚱멀뚱. 나는 그제서야 여기저기 전화를 해요. 아빠에게. 고모들에게. 할아버지 친구에게. 몸이 막 떨렸지만. 많이 울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왜 그랬을까. 눈물이 많이 나오지는 않았어요. 할아버지가 계신 방으로 가 보았죠. 번쩍 뜨고 있던 억울한 눈은 옆집 아주머니가 감겨 드렸고 이제 할아버지는 가슴에 손을 모으고 누워 있어요. 그 때는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가 늘 있던 그 자리에, 다만 머리 방향을 반대로 하고 똑같이 누워계셨거든요. 저 사람이 내 할아버지인가. 점심시간이면 내가 학교에서 달려와서 서툰 솜씨로 밥을 차려 드리고 새벽이면 내가 일어나서 연탄불을 갈아드렸던 내 할아버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냥 누워계신 것인지 정말 돌아가신 것인지. 사람들이 왜 모두 달려와서 우는 것인지. 아무것도 실감나지 않았어요.
 
  오후에 엄마가 왔죠. 고모들은 집을 나가 있던 엄마 때문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라며 온 골목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고 엄마를 때렸지만 그건 아빠 때문이에요. 우리 모두의 가슴에 못을 박은 건 아빠예요. 할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든 건 아빠예요. 엄마가 집을 나가게 만든 건 아빠예요. 할아버지가 쓰러졌는데도 새벽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건 아빠예요. 쓰러진 할아버지를 두고 새벽 일찍 나가버린 건 아빠예요. 할아버지와 우리 먹을 것 하나 제대로 마련해주지 못한 건 아빠예요. 엄마를 매 맞게 한 건 아빠예요. 우리를 울게 한 건 아빠예요. 자신이 어느 것 하나 책임지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 놓고 도망간 건 아빠예요.
  그런데도 내가 죄책감을 가지게 만든 건 아빠예요. 그 때 나는 이미 죽었어요. 그러니까 날 죽게 한 건 아빠예요. 나는 겨우 열 네 살이었어요. 다 당신 때문이에요.  


 

-2007.5.25 한 페이지 단편 소설에 업데이트.
Posted by 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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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을 회복하자 걸음걸이부터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이전의 그는 늘 손을 주머니에 넣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땅만 보며 휘적휘적 배회하듯 걸어다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앞뒤로 활기차게 손을 흔들며 허리를 당당하게 편 채로 여유있는 웃음을 만면에 띄우고는 세상을 향해 당당히 고개를 들고 걷는 것이다. 이렇게 당당한 걸음걸이는 입사 3년 만에 처음이다. 그는 지금,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라도 악수를 청할 것만 같다.

사실 그는 대학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인사였다. 그는 어느 모임에서든 사랑받는 리더였으며 기획하는 프로젝트마다 놀라운 추진력을 발휘해 각종 대회와 공모전을 휩쓸고 다니는 촉망받는 기대주였다. 때문에 입사 후에도 그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입사원임에도 불구하고 각종 회의에서 전혀 주눅들지 않고 의견을 발표했으며 생각나는 대로 프로젝트를 기획해 열심히 제안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왠일인지 모든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당차게 발표한 의견들에는 시큰둥한 반응이 대부분이었으며 언제나 그의 것보다 약 1% 더 빛나는 아이디어들이 그의 제안을 밀어내고는 했던 것이다. 결국 늘 자신감에 차 있던 그는 입사한 지 불과 2개월도 안 되어 우울증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종종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나 잠자리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열심히 적고 다듬어 제안서을 내놓았다. 물론 그 때마다 돌아오는 건 여전히 실망 뿐이었지만.

그렇게 3년을 보냈음에도 불과 한 달 전에 그는 또 같은 일을 당한 터였다. 이제는 정말 모든 기대를 버리고 조용히 시키는 일이나 하며 자리나 지켜야겠다고 생각해 왔는데 바로 두 주 전에 그만, 버스 안에서 또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만 것이다! 그것은 버스가 정류장에 잠시 멈추었을 때 무심코 창 밖을 내다보다가 떠오른 작은 아이디어였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마침내 다음 날 오후 쯤에는 엄청난 프로젝트가 되고 말았다. 그날 저녁 쯤 집에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그건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부터 그의 가슴은 다시금 자신감으로 벅차오르고 견딜 수 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 뒤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날 며칠을 망설이다가 이제서야 그 제안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침착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너무나도 훌륭한 자신의 제안에 도취되어 그는 자꾸만 입가가 간지러웠다. 그는 입사 이래 가장 당당한 모습으로 멋진 프리젠테이션을 해낼 것이며 사람들은 그의 발표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저들끼리 수근거릴 것이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내 저 사람, 언젠가 일 낼 줄 알았다구'
'정말 천재적인걸!'
'끝나고 같이 술 한 잔 해야겠네'

하는 말들이 귓가에 벌써 들려오는 것 같았다. 순간, 발표가 끝나면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쳐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이내 클클 웃기도 했다.
 
'아 드디어 내가 본격적으로 진가를 발휘할 때가 왔구나!'

그는 다시 한 번 씨익 웃고는 심호읍을 한 번 크게 하고 당당하게 회의실로 입성했다.

2

아직 회의는 시작되기 전이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서고 탁자 위에는 먼저 도착한 이들의 기획안이 다섯 부 정도 놓여져 있었다. 그도 자신의 기획안을 가지런히 챙겨 옆에 놓고 다른 기획안들을 하나씩 챙겨 자리에 앉았다. 등받이에 거만하게 등을 기대고 다리를 한 번 꼬아준 후 그는 다른 기획안들을 하나씩 훑어보기 시작했다. 모두 자신의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제안들에 불과했다. 심지어 세 번째 기획안을 읽을 때 즈음에는 꼼꼼히 읽어보기도 지루할 지경이었다. 나머지 장들을 대충 휘리릭 넘기고 나서 네 번째 기획안의 첫 장을 넘겼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것과 똑같은 아이디어가 그의 것보다 훨씬 멋진 방법으로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빠르게 솟아오른 혈압과 맥박으로 인해 그는 금방이라도 숨이 막혀 쓰러져버릴 것 같았다. 우선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나서 그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결과는 아직 모르는 것이다. 그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머리 속으로 자신이 할 발표의 내용을 빠르게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발표가 끝났다. 그는 이제 힘없이 자리에 앉아 자신의 기획안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다. 탄성도 수근거림도 기립박수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은 같은 아이디어를 보다 멋지게 포장하여 먼저 발표해버린 K의 몫으로 돌아갔다. 회복할 수 없는 상처가 그의 머리부터 가슴까지 긴 자국을 남기며 파고들어왔고 빛나던 그의 자신감은 벗어 놓은 양말처럼 구석에 완전히 내팽겨쳐지고 말았다. 다시 고개를 숙인 그에게 K가 다가왔다.

"수고하셨어요. 어떻게 저와 그렇게 비슷한 아이디어를! 깜짝 놀랬지 뭡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둘이 이 프로젝트를 같이 추진해보면 어떨까요? 하하하"

마지막 남은, 벗어 놓은 양말만큼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꾹 참고있던 눈물이 그 순간, 툭.툭. 그의 구겨진 기획안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2007.2.27 한 페이지 단편 소설에 업데이트.
Posted by 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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